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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조경 및 조경사조_상명대 이재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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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본 서는 상명대 이재근교수님의 글이며, 전통조경에 대한 개괄적 이해에 도움이 될 듯 합니다.

 
-contents-
Ⅰ. 한국의 전통조경
1. 개괄적인 흐름
1) 기법도입시대
2) 기법정착시대
3) 모방시대
4) 고유수법 확립시대
2. 사상적 배경 
1) 자연숭배사상
2) 음양사상
3) 신선사상
4) 풍수사상
5) 유교사상
6) 불교사상
3. 한국전통정원의 특징
1) 공간구성 및 시설배치
2) 조경요소 및 작정기법
4. 정원유적
1) 삼국시대
2) 통일신라시대
3) 고려시대
4) 조선시대
Ⅱ. 조경사조
1. 현대예술사조의 사적 고찰
1) Pre Modernism 시대에서 모더니즘시대로 전환된 배경 
2) 모더니즘시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시대로 전환된 배경
3) 모더니즘시대에서 해체주의 시대로 전환된 배경 

2. 모더니즘의 일반적 경향과 조경에의 영향
1) 모더니즘의 일반적 내용 
2) 조경에서의 모더니즘적 경향 

3.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반적 경향과 조경에의 영향
1) 포스트모더니즘의 배경
2) 조경에서의 포스트 모더니즘적 경향
3)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조경적 표현기법의 특징
4. 해체주의 사고의 일반적 경향과 조경에의 영향
1) 해체주의의 배경
2) 해체주의의 일반적 내용
3) 해체주의가 조경에 미친 영향
5. 각 예술사조의 비교
6. 우리나라에 있어 예술사조가 공원설계에 미친 영향
참고문헌 : 한국의 전통조경 및 조경사조
 

Ⅰ. 한국의 전통조경

1. 개괄적인 흐름

한국의 古代 庭園에 관하여서는 유구(遺溝)로 남아 있는 것이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문헌을 더듬어 그 윤곽을 추측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실정이다.
신빙할 수 있는 정원의 기록으로는 백제 진사왕(百濟 辰斯王) 7년(A.D.391)에 "백제중수궁실 굉지조산 이양기금이훼"(百濟 重修宮室 穿池造山 以養奇禽異卉)"라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우리나라의 각종 문화나 민속 등이 中國의 영향을 크게 입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원의 조영법(造營法 )또한 中國의 수법을 받아들여 그 뒤 시대사조의 흐름과 민족성에 힘입어, 이른바 우리의 고유수법으로 굳혀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庭園手法의 시대적 구분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4가지시대로 나눌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즉, 제1기는 기법도입시대(技法導入時代)로서 삼국시대가 이에 해당한다. 제2기는 기법정착시대(技法 定着時代)로서 통일신라시대가 해당되며, 제 3기는 고려시대로서 중국의 발달된 수법을 그대로 답습하는 모방시대(模倣時代)이다. 
제 4기는 조선조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시대사조와 민족의 특성이 정원수법에 영향을 미쳐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굳어진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고유수법도입시대(固有手法導入時代)라 부른다. 이상의 네 시기를 역사적 시대구분과 견주어 본다면 아래와 같은 관계가 성립된다.

기법도입시대 삼국시대 고대
기법정착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대후기
모방시대 고려 시대 중세
고유수법도입시대 조선조시대 근세


1) 기법도입시대(技法導入時代)

(1) 백제의 정원
백제의 정원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제 15대 진사왕 7년에 궁실을 중수하는 한편 연못을 파고 산을 쌓아올려 진귀한 물새를 키우고 화초를 가꾸었다는 기록이다.
이때 백제의 궁실은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춘곡리에 위치하였다고 전하여지는 하남위례성이다. 그 뒤 백제는 남하하는 고구려의 힘에 못 이겨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한다. 제 23대 동성왕은 공주의 鎭山인 공산성 속에 임류각(臨流閣)을 지어 못을 파고 놀이를 하는 자리로 삼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전에는 임류각이 공산성 마루턱에 위치하고 연못은 중복(中腹)에 자리 잡은 영은사 바깥마당에 있었던 것으로 고증되고 있었으나 최근 공산성 남문 밖 금강가에서 방지와 건물의 유구가 발굴됨으로써 새로운 시각에서 연못에 관한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으로 사료되었다..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 뒤 60여년 만에 다시 도읍을 사비(지금의 扶餘)로 옮겨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 그 뒤 30대 무왕의 치세에는 궁남에 이궁을 조영하여 노장사상에 의하여 중국에서 싹텄던 신선정원의 수법을 받아들여 큰 연못 한 가운데에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쌓았다고 하며, 이것이 현재 부여에 유구로 남아있는 궁남지(宮南池) 이다. 이 밖에도 무왕은 경승지를 修景하여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백제가 중국의 정원조영수법을 받아들이는 구실을 한 것은 지리적으로 중국본토와 거리가 가까웠던 탓으로 생각된다. 무왕의 뒤를 이은 의자왕은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가 하면 후비와 부녀들이 정치에 간여하여 현량한 신하를 모해하는 등 내부적으로 부패하여 마침내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망하고 만다.

(2) 고구려의 정원
고구려는 주몽, 즉 동명성왕이 기원전 37년에 만주환인(桓仁)에 작은 부족국가를 세운 것으로부터 비롯되며, 보장왕 27년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당할 때까지 705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만주전역과 한반도 북반을 영토로 장악하고 있었으나 정원에 관하여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안학궁은 평양시가 동북방 대성산 밑에 자리한 장안성 안에 조영된 궁궐로서 해방 전까지만 하여도 남정에 해당되는 위치에 정원과 도수구(導水溝)의 유구가 남아 있었으며 정원에는 연못과 석가산이 축조되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평양 永明寺 속에는 구제궁(九梯宮)이라는 궁궐이 있었다고 한다.


2) 기법정착(技法定着)시대

통일신라시대의 정원에 관하여서는 안압지(雁鴨池)의 유구가 거의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 당시의 技法과 꾸밈새를 여실히 살필 수 있다. 그 기법을 보면 정교하기가 이를 데 없으며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정원기법(庭園技法)이 완전히 소화흡수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이 통일신라시대는 우리나라 정원문화사상 기법정착시대(技法定着時代)라 할 수 있다.

안압지가 축조된 것은 문무왕 14년 (A.D 674)으로서 삼국통일(三國統一)의 위업을 이룩한지 5년만의 일이다. 축조에 종사한 공인(工人)은 신라(新羅)사람들뿐만 아니라 백제나 고구려의 공인들도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경주(慶州)에는 안압지(雁鴨池) 이외에 더 한군데 유수한 통일신라시대 정원의 유구가 남아있다.
남산 서록 송림 속에 묻혀 있는 포석정(鮑石亭)이 그것이다. 이 자리는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즐겼던 곳으로서 곡수연지(曲水宴址)라고도 부른다. 다듬은 돌로 우아하게 굽이친 수로가 마련되어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그 잔이 자기 앞에 당도할 때까지 시 한수를 짓는 풍류놀이를 하던 곳이다. 

3) 모방시대(模倣時代)

475년간 계속된 고려(高麗)시대는 한 마디로 말하여 중국 송(宋) 나라 때의 발달 된 정원기법(庭園技法)을 그대로 모방한 시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봉건사회의 포화(飽和)에서 싹튼 도시문화(都市文化)와 귀족문화의 타락은 집권자들로 하여금 향락과 낭만에 젖어 해이와 허탈 속으로 빠져들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정착되어 새로운 방향으로 발돋움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던 정원기법은 무시되고 발전된 중국수법에 현혹된 나머지 무조건 이것을 받아들이는 결과를 빚게 된다.
고려는 정원과 더불어 개성(開城)의 명당자리 만월대(滿月臺)에 궁궐을 조영하는데 그 궁궐 안에는 동지(東址)라고 불리는 후원(後苑)이 꾸며진 듯하다. 그 뒤 제 16대 예종(睿宗)과 제 18대 의종(毅宗)은 정원 조영에 큰 관심을 보여 궁궐 안에 여러 개의 화원을 꾸며 즐긴다. 화원은 중국식 명칭으로 궁궐건물(宮闕建物)로 둘러싸인 네모난 공간 속에 꾸며놓은 정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북경(北京)의 자금성(紫禁城) 속에도 어화원(御花園), 건륭화원 등의 이름을 가진 화원이 남아 있다. 예종의 경우에는 민가의 화초를 빼앗아 화원에 심었으나 만족치 못하여 송(宋)나라로부터 많은 화초나 꽃나무를 들여오는 바람에 자금이 바닥났다고 한다. 의종은 궁궐에 인접한 많은 민가를 수탈하여 이곳에 돈대를 쌓아 여러 채의 대사누각을 지어 놓았으며 청기와나 당종려 껍질로 지붕을 이었고 괴석을 모아 선산을 꾸며 물을 끌어들여 분수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 이외에도 의종은 교외의 경관이 수려한 곳을 골라 정자(亭子)를 지어 놀이터로 삼았으며 냇물을 가로막아 호수를 만들어 흥취를 돋우었다. 의종은 점점 이것이 원인이 되어 폐위당하는 한 원인이 된다.
개인정원에 있어 두드러진 것은 권신 최충헌과 김치양이 꾸며 놓은 정원이다. 최충헌의 정원은 그 넓이가 수리(數里)에 이르렀고 마치 금원과도 같은 꾸밈새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그의 아들 이(怡)는 원나라의 침공을 받아 강화로 이동하였을 때에도 수십리에 이르는 광대한 원림을 경영하여 군졸을 동원하여 멀리 안양산(安養山)으로부터 소나무와 전나무 등을 굴취 해다가 심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순천관(順天館)이라는 객관이 있었는데 노송이 우거지고 맑은 계류가 굽이쳐 흐르는 한 가운데에 자리 잡아 경관이 대단히 아름답다고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적혀 있다. 고려시대에는 내원서(內園署)라는 관청을 두어 궁궐과 관청의 정원을 관장시켰으며 이 제도는 朝鮮朝까지 계승된다.

4) 고유수법확립(固有手法確立)시대 (근세의 한국정원)

멀리 삼국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여졌던 신선설을 기반으로 하는 정원양식은, 조선조가 되면서 국교로 삼았던 유교와 당시 성행되었던 풍수도참설(風水圖讖說)의 영향을 받아 크게 변모하여 마침내는 딴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고유양식으로 굳혀진다.

(1) 방지원도의 정원
연못은 정원의 구성요소로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의 하나이다. 이집트의 방지에 의하여 대표되는 고대서방세계의 연못은 물론 중국 진나라의 연못 등 그 크기나 생김새는 어떠하든 간에 정원이라고 할 만한 곳에는 거의 모두 연못이 꾸며져 있다.
우리나라의 정원 속에 꾸며진 연못을 시대적으로 살펴보면 고대의 그것은 주로 곡지, 즉 자연형의 연못으로서 불로장생을 희구하는 신선사상이 담겨진 꾸밈새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근세로 들어서면서 방지, 즉 네모난 직선형의 연못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 한 가운데에 둥근 섬을 쌓아올림으로써 방지원도가 생겨난다. 이 연못의 생김새는 유교의 우주관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근원을 두고 있다.
방지원도(方地圓島)의 실례로서는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와 경복궁의 향원지를 들 수 있으며 기타 지방의 전통 있는 고가의 정원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 연못의 꾸밈새는 궁궐지를 살펴볼 때 17세기말 숙종조에 굳혀진 것으로 보인다.

(2) 화계(花階)
화계란 한옥 안채의 후면에 자리 잡은 사면을 계단 형으로 다듬어 장대석을 직선(直線)으로 앉혀 흙이 유실되지 않도록 해놓은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조에는 풍수도참설에 가리키는 바에 따라 양기, 즉 택지(宅地)를 선정하였으며 그 내용인즉 언덕을 등지고 남을 향하여 완경사를 이룬 자리를 가장 좋은 터로 삼고 있다. 또한 앞이 좁고 뒤가 넓어야 길(吉) 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자리를 찾아 건물을 남쪽으로 당겨 지어 놓으면 건물 후면에 경사진 넓은 공간이 남게 된다. 
여기에 흙의 유출을 막기 위하여 계단형으로 장대석을 쌓아올리게 되면 바람이 잘 통하고 햇빛이 잘 닿는 꽃나무를 가꿀만한 자리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우리 조상들은 여기에 키작은 꽃나무를 심는 한편 운치를 돋우기 위하여 석함을 놓아 괴석을 앉혔으며 물을 곁들이기 위하여 꽃나무 밑에 돌을 쪼아 만든 작은 수조, 즉 세심석(洗心石)을 놓아 이름하여 화계(花階)라 하였다.
경복궁의 침전이었던 교태전의 후정인 아미산을 비롯하여 창덕궁 대조전의 후정, 창덕궁 낙선재의 후정, 창경궁 통명전의 후정 등이 그 예이다.

(3) 정원공간의 꾸밈새
조선조의 상류주택의 꾸밈새를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솟을대문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행랑채가 자리 잡으며 다시 중문을 들어서면 협문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와 안채에 이른다. 또한 사당은 흔히 사랑채 뒤쪽에 위치하며 별당이 있는 경우에는 안채의 뒤쪽 구석진 곳이 그 자리가 된다. 이러한 꾸밈새를 놓고 볼 때 한국의 전통적인 상류주택의 정원공간의 구성은 아래와 같이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대문 밖 : 바깥마당 전정
행랑채와 중문사이 : 행랑마당 문정(門庭)
안채 앞 : 안마당 중정 또는 내정
안채 뒤 : 뒷마당 후정
사랑채 앞 : 사랑마당 전정
사당채 앞 : 사당마당 사우정(祠宇亭)
별당채앞 : 별당마당 별당정
뒷담 너머의 공간 : 후원 후정

(4) 궁궐의 후원
궁궐(宮闕) 또한 풍수도참설에 따라 그 터를 정하였기 때문에 전각군 뒤에 넓은 공간이 생겨나 이곳을 후원(後苑)으로 삼았다.
현존하는 것은 경복궁의 향원지, 녹산(綠山)을 중심으로 한 후원과 창덕궁의 후원, 두 군데 뿐이다. 그러나 창덕궁의 후원은 거의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어서 조선조의 후원의 꾸밈새를 여실히 보여준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 그대로의 기복을 가진 수림 속에, 지형에 따라 알맞게 방지를 꾸며 물가에 누각이나 정자를 앉힌, 자연미와 인공미가 서로 조화를 이룬 소정원이 곳곳에 산재한다. 부용지를 중심으로 한 소정원을 비롯하여 애련지의 소정원, 반도지와 반월지의 소정원, 옥류천을 중심으로 한 소정원이 그것이다. 그 이외에도 숲 속 마루턱에는 청심정, 취규정, 능허정 등의 아담한 정자가 앉아 숲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특히, 옥류천은 인공미와 자연미의 조화가 극치를 이루는 공간으로 손꼽힌다.

(5) 별서의 정원
별서는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은둔생활을 즐기고자 하는 목적으로 꾸며 놓은 건물이다. 한적한 생활을 원하기 때문에 흔히 산속 경관이 좋은 곳에 위치하였으며, 대개 본채와 0.2-2 ㎞정도 떨어져 별도의 절제된 생활을 할 수 있는 초막이 형성되고, 냇물과 지형을 살린 정원이 꾸며졌다. 
냇물을 얻을 수 없을 때에는 방지가 꾸며지며 지형에 따라 화계에 해당되는 대가 만들어져 매화나무, 대나무 따위를 심어 운치를 돋우었다.


2. 사상적 배경

1) 자연숭배사상

일찍이 선사시대로부터 발생된 한민족의 자연숭배사상은 천혜적으로 아름다운 산수진경에 둘러싸인 풍토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발생된 것으로서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연계의 섭리를 신앙으로 승화시켜, 하늘과 땅과 사람이 일체가 되어 질서정연하게 공존하여 왔다. 이러한 사상은 결국 중국이나 일본과도 다른 순수한 자연풍경식 정원양식을 낳게 하였다.

2) 음양사상

고대의 족장사회 때 하늘과 땅, 남과 여, 해와 달, 명(明)과 암(暗)에서와 같은 상대적 대비와 조화의 관념에 근거하여 유래된 사상이 음양사상이다.

동이(東夷)의 풍속 중에 보리[陽]와 벼[陰]를 항아리 속에 나란히 꽂아 신을 섬기는 부루단지나 고구려시대의 봉분 주변에 심은 소나무[陽]와 잣나무[陰] 등은 모두 음양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옛부터 해와 달은 양과 음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어 고대인들은 양성인 해 속에 음성의 까마귀가, 음성인 달 속에 양성의 토끼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양중음(陽中陰)과 음중양(陰中陽), 즉 동일물체에서의 음양의 공존을 나타내는 것이다.
전통정원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음양사상은 천(天)·지(地)·인(人)의 삼재사상(三才思想)과 수리사상(數理思想)으로 발전되었으며, 음(陰)·양형(陽型)과 음양화합형(陰陽和合型)의 정원문화(庭苑文化)를 낳게 되었고, 그것은 정원의 모든 꾸밈새의 기본원리로 활용되었다.

3) 신선사상

신교(神敎), 선교(仙敎), 선도(仙道), 풍교(風敎), 무교(巫敎), 화랑교(花郞敎) 등으로 불려온 신선사상은 한민족의 자연숭배사상과 단군의 제천의식이 바탕이 된 무속신앙의 일종으로 한민족의 시원사상(始源思想)이다.

단군시대의 신선문화 중 정원과 관련된 대표적인 것으로는 신시(神市)와 천단(天壇)을 비롯하여 별읍(別邑)과 소도 등의 성역적인 신원(神苑)을 들 수 있다.
그 후 뜰에 나타난 삼신산(三神山)(또는 삼신도(三神島))은 우리고유의 삼신(三神)을 섬겼던 태백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부여의 궁남지(宮南地)의 경우에는 못에 하나의 섬을 조성하여 삼신을 간접표현하고 있으며, 경주의 월지(月池)는 세 섬을 조성하여 삼신을 직접 표현하고 있는데, 이 섬들은 중국의 삼신설화 속에 나오는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전통공간의 조성에 있어 신선사상의 영향은 자연숭배 및 도교사상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즉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입장에서 자연을 통찰하고 융화하려는 전통적인 자연관에 따라 정원의 조성 시 자연과 같이 비정제성을 추구하고 기존지세에 따라 시설을 배치함으로써 자연과의 조화를 도모하였다.

4) 풍수사상

'풍수'란 생물이 살고 있는 땅과 인간과의 근원적인 관계를 밝힌 것으로, 산(山) · 수(水) · 풍(風) · 광(光)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기(氣)의 발전양상을 인간의 길(吉)과 흉(凶)에 연결하는 사상이며, 도성 · 사찰 · 주택 · 분묘 등을 축조하는 데 있어 재화(災禍)를 물리치고 행복을 가져오는 지상(地相)을 판단하는 이론으로 동양인의 생활 속에 깊숙이 박혀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기록에서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B.C.37~19년 재위)이 국도 선정 시 그 지방의 지세와 수계(水系)를 관찰하여 졸본(卒本)에 도읍을 정한 사실이 나타난다. 또,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 : B.C.18~A.D. 28년 재위)은 지금의 북한산(北漢山)에 올라 주위의 산세를 관찰하였다고 하였으며, 신라의 경우에도《삼국유사》기이권일(紀異 券一)에 석탈해왕(昔脫解王:A.D.57~80년 재위)이 월성(月城)을 축조할 때 주변의 풍수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고, 권삼(卷三) 천룡사조(天龍寺條)에는 산수가 뛰어난 곳에 절터를 골랐다는 등의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같은 풍수사상의 영향으로 자연에 순응하는 다양한 조원기법이 개발 보급 되었으며, 뒤뜰의 경사지를 활용하는 화계(花階)와 앞뜰의 지당(池塘)이 많이 생겨났다.
한편 도선(827 ∼ 898년)의 풍수비보설이 나온 후에는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자연풍수의 여건에 보완하려는 목적에서 동산을 꾸미는 예가 많아졌으며, 전남 화순의 운주사의 경우처럼 지형상의 허점을 인공으로 보완하기 위해 많은 석탑을 조성한 예도 볼 수 있다.

특히 풍수지리의 양택론(陽宅論)에서는 입지선정 시 수구(水口), 야세, 산세, 토색, 수리, 조산조수가 모두 좋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길지의 형국을 제시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조옥의 방법까지 다루고 있다. 이에 따라 도읍이나 마을의 입지선정은 물론이고 주택의 입지선정, 배치방법, 평면의 형태, 심지어는 대문 및 주 출입구의 결정과 수목의 선정 및 배치에 이르기까지 풍수지리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5) 유교사상

유교사상의 영향은 남녀의 구별에 따른 공간분화와 음양에 따른 안팎구조의 형성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한 문중이 집단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대가족제도로서 동일주거지 내에 기거하거나 주거지 내에 사당 즉 제사공간을 조성하는 등, 조상숭배사상에 기인한 공간배치와 조성기법들이 나타난다.
조선시대의 이황(1501-1570)과 이이(1536-1584)는 뛰어난 유학자로 우주의 본질이 이(理)와 기(氣)의 이원으로 구성되고 이와 기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심오한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밖에도 인덕(仁德)을 가르치기 위한 향교와 서원이 전국에 세워져 공공정원이 보급되었고, 민가에 있어서는 남녀, 신분상의 상하 등 위계에 따라 주거공간이 분리되었으며, 뜰의 기능이 다양화되고 별당과 별서정원이 늘어나게 되었다.

6) 불교사상

불교사상이 우리정원문화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사원의 가람배치는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정신문화를 주도하였고, 특히 삼국시대후기에 성행된 정토종(淨土宗)과 선종(禪宗)은 한국적인 정토사원과 선원, 그리고 다원의 꾸밈새에 영향을 주었으며, 불교미술과 환경조각물로서의 가치를 동시에 지니는 석등, 석탑, 석불, 석비 등의 석조미술품을 남겼다.


3. 한국전통정원의 특징

1) 공간구성 및 시설배치 

전통공간의 구성 및 시설배치상의 특성은 공간의 유형이나 각 유형별 사례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으나 한국의 전통공간에서 공통적으로 추출할 수 있는 일반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원적(二元的)인 공간구성
전통공간은 서로 상대되는 2개의 공간으로 구획되는 특성을 갖고 있으며 이들의 연결과정에서 공간적 분위기를 대비시키는 방법으로 변화성을 추구하고 있다. 즉 시각적, 심리적 개방공간과 폐쇄공간, 자연공간과 인공공간, 허의 공간과 실의 공간 등 서로 대립되는 공간들의 상호연결을 통하여 다양한 공간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이원적인 공간구성은 우리고유의 음양의 원리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2) 연속적인 공간체계
궁궐, 사찰, 주택 등의 전통공간은 그 성격이나 기능에 따라 몇 개의 소단위공간으로 세분되는데 이들 공간이 서로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랫 계급에서 윗 계급으로, 공적 공간에서 사적 공간으로, 속(俗)의 영역에서 성(聖)의 영역으로 각각의 공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최종적으로는 자연공간으로 승화하는 연속적인 공간체계를 갖고 있다.

(3) 위계적인 공간질서
전통공간은 성에 따른 남녀의 구분과 신분적 질서에 따른 상하의 구분으로 인하여 강한 위계적 질서를 보여주는데 경사지에서는 하단에서 상단으로 올라갈수록 중요한 건물이 배치되고, 평지에서는 기단의 높이와 격식에 따라 위계성을 표현하고 있다.

(4) 대칭적 비대칭
궁궐이나 사찰 등 공공성과 권위성이 강한 정원공간에서는 비교적 엄격한 중심축을 설정하여 시설배치가 이뤄지나, 배치, 축, 규모 등에 있어서 엄밀하게 대칭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는 자연의 비대칭적 요소가 대칭을 지향하려는 건축개념과 타협하여 이루어진 중용적(中庸的)사상의 결과라 할 수 있다.

2) 조경요소 및 작정기법(作庭技法)

(1) 정원건축물의 도입 

정원이나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잠시 머물러 쉬면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조성된 건축물로는 정(亭), 루(樓), 대(臺), 당(堂), 사(謝), 헌(軒), 제(齊) 등이 있는데 이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정자와 누대이다.
정자의 평면적 형태는 매우 다양 하나 구조가 간단하고 시공이 쉬운 사각형이 가장 일반적이고 주로 원림내의 지당이나 계류(溪流) 주변과 강변, 산기슭, 바닷가 등의 경승지에 위치하고 있다.
정원건축물로서의 정자는 지당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지당과 관련된 정자의 위치는 지당과 인접한 곳에 배치하는 경우와 지당의 경계부에 배치하는 경우, 중도 내에 배치하는 경우로 대별할 수 있으나 지당의 경계부에 입지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정자나 누각은 사람이 쉬는 공간인 동시에 정원공간 속의 경물적 경관을 구성하는 기능을 하였다.
정자는 초정, 와정, 너와를 이은 너와정, 죽정등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다양하게 건립되었다. 정자에는 방이 있는 것과 없는 것. 1층과 2층, 다양한 지붕형태의 건물들이 있고, 건축의장에 있어서도 겨자난간, 완자, 당초문, 아자등 공예적기법을 동원한 난간과 문살 등이 만들어졌다.

(2) 물의 이용
전통정원에서의 물은 공간구성이나 경관상의 기본요소로서 계류와 지당이 가장 보편적인 형태이고 그 외 석연지(石蓮池), 석간수(石澗水), 비구(飛溝), 천정(泉井) 등이 도입되었다.
전통적인 수경기법의 가장 큰 특징은 정원의 주변이나 내부에 계류를 끌어들이고 정자마당에는 지당을 조성함으로써 유수(流水)와 지수(止水)를 동시에 취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있다.
일반적으로 계류는 정원의 전면 외곽부에 입지하고 있어 외부와의 경계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위에 설치된 석교나 간단한 판석교를 통하여 진입이 유도된다. 또한 지당은 인공성이 강한 경관요소의 하나로서 방지의 형태가 대부분이고 지당 내에는 보통 1개- 3개의 원도(圓島)를 축조하는 것이 보통이다.
지당의 조성은 우선 연못의 가장자리를 장대석이나 막돌로 쌓고 물이 입수 또는 배수되는 곳에는 수구(水口)와 석루조(石漏槽)를 두었으며 때로는 중도(中島)를 연결하는 다리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3) 경계 및 영역의 설정
전통공간의 구분 및 연결은 크게 정원의 내, 외부를 구분하는 경우와 내부적으로 공간의 영역을 설정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외부와의 경계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물리적 요소는 담장이고 그 외 자연지세나 계류, 바위, 수목 등이 자연경계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내부적인 영역설정을 위한 기본소재로는 낮은 담장과 대문, 계류 및 다리, 석축과 계단 등이 사용되었으며 이들을 적절히 혼용함으로써 공간의 강약을 대비시키고 연속적인 분위기에 변화를 주었다.

(4) 차경(借景)기법의 발달
정원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전통적인 자연관으로 인하여 정원의 조성시 정원의 내부만을 정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자연공간 모두를 정원으로 확대, 조화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외부의 자연경관을 내부로 끌어들이는 차경수법이 발달하였는데 주로 담장이나 처마의 높이를 조절하여 시선의 개방 및 폐쇄의 정도에 변화를 줌으로써 의도하는 외부경관을 정원내부로 끌어들였다.

(5) 가산의 조성
일반적으로 가산은 평지에 만든 작은 산으로서 원래 축경(縮景)의 의도 하에 조성되었으나 실제공간을 형성하고 정원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려는 복합적인 목적 하에 조성되었다. 즉 자연요소를 축소하여 도입함으로써 정원 내에서 산야의 풍광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심리적 효과를 도모하고, 외부에서의 시선차폐나 공간의 깊이를 확대하는 완충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평지의 정원에서 연못을 파고 남는 흙과 돌로서 동산을 조성하는 것은 극히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작정기법이라 할 수 있다.
담양 소쇄원, 논산의 윤증고댁, 함양의 정여창고댁, 성주의 이해석가, 경주 안압지와 진주시 박우희가의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 정원 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6) 화계(花階) 및 꽃담의 축조
일반적으로 경사지에 조성된 전통정원의 후원에는 장대석이나 자연석으로 석단을 축조하고 그 위에 초화류나 화목류 위주의 식재를 하여 화계를 조성하였다. 이 화계의 단에는 괴석 및 석분, 석지 등의 경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수직적인 경관요소로서 화전굴뚝이 배치되기도 하였다.
또한 전통정원에 도입되는 수직적 요소의 하나로서 화담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담벽에 여러 형태의 장식 문양을 넣어 경관적 효과를 도모하는 것으로서 궁궐정원에 많이 나타난다.

(7) 다양한 경물(景物)의 도입
일반적 점경물(點景物)은 비교적 규모가 작고 개별성이 강하며 이동성이 있는 단위경관요소라 할 수 있는데 전통정원에서의 점경물은 암석을 소재로 한 것이 대부분으로 보통 장식이나 실용적인 목적하에 설치되었다.
장식목적의 점경물은 조형성이 양호한 자연석이나 인공석을 배치하여 감상하는 것으로서 석가산, 괴석, 치석(置石), 석상(石像), 식석(飾石), 석탑 등이 있으며, 실용목적의 점경물로는 석상(石床), 석연지, 하마석(下馬石), 석분(石盆), 돌확, 대석(臺石) 등을 들 수 있다.

(8) 조경식물
한국의 전통정원 속에 배식된 식물들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전지하거나 인공적 자연의 기교를 가미한 나무를 심지 않았다.
수종을 보면 나무자체가 상징성을 가진 것이 있다.
은행나무를 보면 공자와 관계된 것이라든지, 괴목(槐木)은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를 말하는데 왕궁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든지 하는 것이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송, 죽, 매, 란, 국, 죽, 연을 좋아하였다. 민가에서는 감, 대추, 모과, 배, 살구, 밤, 포도 등 과일나무를 좋아하였다.
수형에 있어서는 직간(直幹)으로 자라는 수형보다 사간(斜幹)으로 자라는 나무를 좋아하였다. 연못속의 섬에는 향나무를 심은 것도 있다. 제사와 관련된 곳에는 향나무를 심었고, 민가의 마당에는 식재하지 않았다.
화목에 있어서는 수림을 조성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화포(花圃)나 일년초의 화단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전통정원에 나타난 조경식물 이용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록수목의 수가 극히 적고 낙엽활엽수를 주로 사용하였다.
둘째, 정원 내에 화목(花木)이나 과목(果木)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셋째, 교목(喬木)보다는 중목(中木)이나 관목(灌木), 초화류(草花類)가 많이 사용 되었다.
많이 쓰인 조경식물에 관해서는 홍만선의 "산림경제", 강희안의"양화수록"등에 잘 나타나 있다.

4. 정원유적

1) 삼국시대 

고구려는 시조3년에 조성한 국내성(國內城)의 유적이 중국 통구산성자(通溝山城子)에 남아 있는데 성은 동서가 약 610m로서 성내에는 원지(苑池)가 남아있다.
백제의 정원유적으로는 공주의 웅진성내의 금강(錦江)가에 계단을 지어 조성한 장방형의 우물로 보이는 못이 1982년 발굴조사 되었다. 백제의 무왕이 634년에 조성한 부여 宮南池는 일부가 복원되어 있는데 못 가운데는 방장선산의 섬이 있고 주위에는 버드나무가 무성하다. 현재 섬에 정자를 짓고 다리가 설치되어 있으나 이는 백제시대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외에 정림사지원과 송산리고분 등이 있다. 
신라시대 조경유적으로는 신라가 101년 도성(都城)으로 축조한 월성(月城)의 성밖 북쪽과 동쪽으로 해자(垓子)처럼 생긴 연못이 발굴 확인되었다. 그리고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설화가 있는 계림이 남아있다. 계림의 가운데는 개울이 흐르고 느티나무와 왕버들의 원림(苑林)이 조성되어 있으며 원림 속에는 제단이 있었다.

2)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 조경유적으로는 경주 안압지가 발굴 조사되었다.
이 안압지는 674년에 완공된 원지로 조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다.

3) 고려시대 

고려의 조경유적은 강원도 춘성군 북상면 청평사의 문수원 선원이 있다.
1090-1110년, 이자현에 의하여 조성되었는데 지금도 맑은 물이 넘치는 연지와 반석 등 자연석을 잘 배치하였고 당, 헌, 암, 정의 터와 황매, 은행, 느티 등 원림이 남아있다.
고려시대 궁원의 대표적인 것은 송도의 만월대(滿月臺)로서 이를 감싸고 있는 궁성에는 13개의 문이 있으며,궁궐의 배치는 조정의 정사를 논의하는 정전과 편전이 남북축선상에 정연하게 배치되어있고, 침전과 부속건물은 지형에 맞춰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삼국시대의 궁궐 같은 상하좌우의 대칭적인 배치에서 벗어나 지형에 알맞게 순응하고 있다.
고려시대이궁의 대표적인 것은 18대 의종이 만든 수덕궁(壽德宮)이 유명한데, 만월대동쪽의 교외로 추측된다. 이외 중미정(衆美亭), 만춘정(萬春亭), 연복정(延福亭)등이 있는데, 모두 호수를 만들어 뱃놀이를 할 수 있게 하였으며, 정자주위에는 화초와 많은 나무를 심었다.
1232년 23대 고종은 몽고군의 침입을 피해 강화에 천도한 후 강화읍 관청리에 궁궐을 지었고, 마니산기슭에 이궁인 흥왕이궁(興王離宮)을 세웠다. 여기에 세운 왕궁터는 사적 33호로서 당시의 건물기단과 3단으로 된 돌계단이 남아있고, 장대석으로 축조된 장방형의 왕자정(王子亭)이 원형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고려왕의 능은 대부분 일반서민의 무덤과 다름없는 초라한 규모이며, 대부분의 능이 이북지방에 있어서 고려의 능원에 관한 자료는 적은 편이다.
강화읍 국화리에 있는 고종왕릉은 고종이 재위 40년의 장수를 했고, 강화에서 승하했으므로 능원의 규모가 클 것 같지만, 능묘의 규모가 작을 뿐 아니라 망주석과 작은 석상 정도의 시설밖에 없어 초라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개성 해선동에 있는 공민왕(1351-1374재위)의 능인 현능과 왕비능인 정능은 매우 화려하다.
현능과 정능은 완만한 산중턱에 축조하였기 때문에 입구 쪽에 여러 층의 계단이 조성되어있고, 봉분앞 단을 따라 좌우에 망주석 1쌍, 장명등 1쌍, 그리고 문인석과 무인석 2쌍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둘레에는 호석이 있으며, 호석표면에는 구름 속에 떠있는 신선의 모습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조각이 있는데,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또한 묘주위에는 돌난간이 있으며, 난간밖에는 갖가지 형상의 석수가 배치되어있다. 현능과 정능은 고려시대의 왕능을 대표하는 능으로 규모가 크고 보존상태도 좋은 편인데, 이 같은 능의 꾸밈새는 조선시대로 계승되었다.
강원도 삼척읍 성내리 오십천변 언덕위에 자리한 전면7칸, 측면 2칸 규모의 죽서루는 관동팔경의 제 1루로서, 고려 충열왕 원년(1274)에 이승휴가 세운 누각으로 조선 태종4년(1403)에 부사 김효손이 중건한 유적이다.
이외 경포대는 고려 충숙왕13년(1326)에 방해정 뒷산 인월사터에 지었던 것을 조선 중종3년(1508)에 강릉부사 한급(韓汲)이 지금의 자리에 옮기고 고종10년(1873)강능부사 이직현이 중수한 것이다.
영남루는 경남 밀양읍 내일동에 세운 것으로 신라 법흥왕(514-1540)때에 창건되었던 영남사터의 종각인 금벽루를 고려 공민왕 14년(1364)에 중수하여 영남루라 하였고, 조선 헌종8년에 화재로 타버려 1844년에 재건한 것이다.
촉석루는 고려말기 공민왕15년(1365)에 창건된 것으로 그동안 8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쳤으며, 현재의 누는 1959년에 세운 건물이다.
연북정(戀北亭)은 북제주군 조천면 조천리 바닷가에 있으며, 고려 공민왕23년(1374)에 세운 것인데, 조선선조 32년(1599)에 목사 성윤문이 중수한 것이다.
연북정 주변에는 많은 비석들이 세워져 비석거리를 이루고 있으며 , 남원의 관문인 대율리에 있는 오리정(五里亭)과 마찬가지로 교통상의 요지에 관가에서 휴식공간으로 조성한 공원이다.

4) 조선시대 

조선의 정원유적은 궁원, 누원, 서원, 별서, 민가, 사찰 등에 많이 남아있다.

(1) 궁원
①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으로 1395년에 창건되고 1506년 연산군에 의하여 경회루가 화려하게 꾸며졌다. 경회루는 방지 속에 있는 동편 섬위에 서있다. 경회루 방지는 남북이 113m 동서가 128m이며 방도섬 두개가 있다. 경회루 방지는 장대석으로 호안을 축조하였고 북쪽호안에는 수입시설인 용두가 있으며 못 속에서 지하수가 솟아난다. 못의 면적은 3,789평이다. 방지의 북서쪽에 느티나무, 회화나무 등의 원림이 있다. 경복궁 북쪽에는 향원지가 있다. 면적은 1,393평이며 네 모서리를 약간 죽인 방형의 못인데 못 가운데에 98평의 원형 섬이 있다.
섬속에 8각형의 향원정이 서 있다. 못에는 연꽃이 있고 못가에는 배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단풍나무, 버드나무 등이 울창하다. 향원지 서북쪽으로 경복궁의 후원림이던 녹산이 옛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외의 경복궁 공간은 많이 변형되었다.

② 창덕궁은 조선별궁으로 1405년 창건되고 1592년 임진왜란에 불탔으며 1609년 복구되기 시작하여 여러 번의 중수가 있었다. 창덕궁의 현재 면적은 131,781평이며 이중에 비원의 면적은 9만 5천 평이다. 비원은 조선왕조실록에는 후원 또는 금원 등으로 불려졌다. 비원은 누정, 계간, 산록, 화목, 괴석, 지당, 담장, 어정 등이 자연스럽게 잘 동화 되어 조선 시대정원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비원은 1636년부터 인조년간에 가장 많이 조성되었다. 옥류천 주위에 어정을 파고 계간을 개척하여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 등을 지었고, 현 반도지 주위의 존덕정, 회우정 등을 지었다. 반도지는 일제시대 변형된 못이며 원래는 방지가 있었다.
1828년 순조는 사대부의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민가인 연경당(演慶堂)을 지었다. 연경당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별당 공간으로 나누어지는데 후원의 다른 건물은 모두 단청을 하였지만 이 건물들은 민가가 되어 단청을 하지 아니 하였다. 사랑채 앞에는 괴석을 배치하고 수조를 놓고 담쪽으로 간략한 화목을 심었으며 안채 후원에는 감나무, 살구나무 등 과실나무와 뽕나무, 철쭉 등을 심었다.

③ 창경궁은 1483년에 창건된 조선의 별궁이다. 현재 면적이 63,859평이며 1909년 동식물원을 조성하면서 창경원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다.
정원유적으로 1834년에 조성된 통명전 후원과 그 서쪽에 위치한 석지와 석교는 미관적으로도 대단히 아름다운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창경궁은 많은 변형이 있었으며 1986년 창경궁복원계획에 의해 상당부분 복구되었다. 

④ 덕수궁의 침강원(沈降園)
덕수궁은 성종(1469-1494 재위)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로 지어진 것인데, 선조26년(1593), 선조가 의주에서 돌아온 후 이를 증축하여 서궁(西宮)이라 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이곳 즉조당에서 즉위한 다음부터 명례궁(明禮宮)이라 불렀으며,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부터 이곳으로 환궁하면서 경운궁(慶雲宮)으로 불리게 되었다.
덕수궁은 인조가 창덕궁으로 왕궁을 옮기면서 270년 동안 별궁으로 사용되었고, 고종의 환궁이 있은 후 다시 정궁으로 사용되어 많은 건물이 세워졌으나 현재는 많이 없어졌다. 1900-1909 년에 지어진 석조전은 유럽의 르네상스 양식을 본뜬 건물로 앞뜰에는 침강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1906년에 영국인 하아딩(Harding.G.R.)의 설계로 꾸며진 것이다. 

(2) 성곽과 제단, 묘원, 읍성 

① 성곽으로는 한양성곽, 남한산성, 수원성 등이 있다.
② 제단으로는 강화의 마니산 첨성단이 있고,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사직단과 국사당(國祀堂)이 있다. 동대문구 용두동의 선농단, 옛 남별궁터인 조선호텔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원구단, 충남공주군 계룡면 양화리의 신원사주변에 산신에게 제사 지내던 중악단 등이 있었다.
③ 묘원(廟苑)유적으로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곳인 종묘가 있는데, 그 넓이가 무려 22만 ㎡ 나 된다. 종로구 궁정동에 자리한 육상궁(毓祥宮)은 본래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신위만을 봉안하던 곳이었으나, 1908년에 순종이 이묘를 철폐하고 이곳에 원종의 모친 인빈 김씨와 경종의 모친 희빈장씨, 진종의 모친 정빈이씨, 장조의 모친 영빈이씨, 순조의 모친 영빈박씨, 영친왕의 모친 순빈 엄씨를 함께 봉안함으로써 칠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것은 사적 149호로 지정되어 있고, 넓이는 24,000㎡ 이며 ,입구의 부대시설공간인 재실영역과 안쪽에 위치하는 사당영역으로 구분된다.
사당이 있는 뜰에는 냉천이 흐르고, 냉천정과 모정이 자연림 속에 자리하고 있어 일반궁원에서의 후원과 같은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그 외 종로구 숭인동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동묘(東廟)와 남산의 남쪽기슭에 위치하였던 남묘(南廟)의 터가 중국식 석가산의 형태로 일부가 남아 있다.
④ 읍성은 군이나 현에 해당하는 지방행정의 중심도시를 말하는 것으로 충남 홍성읍 오관리에 있는 홍주읍성, 서산군 해미면 해미읍성, 전남 승주군에 있는 낙안읍성,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에 있는 정의읍성(旌義邑城)등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3) 성균관과 향교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은 나라에서 관장한 조선시대의 최고교육기관으로 고려 충선왕(1308-13년 재위)때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명한데서 시작하였으며, 향교는 주, 목, 부, 군, 현에 세워진 지방유생들의 교육기관으로 지방마다 대표적인 시설들이 세워졌다. 전북 장수군의 장수향교, 나주의 나주향교 승주군의 벌교향교, 강릉의 강릉향교, 충남의 천안향교 등이 있다.

(4) 서원 

서원의 정원유적으로는 경북 안동군 도산면의 도산서원이 대표적이다. 1557년 퇴계가 도산서당을 짓고 학문을 수학하던 곳인데 퇴계가 죽은 후 1574년에 그의 제자들이 도산서원을 조성하였다. 이 서원에는 유교적 자연주의 정원이 형성되어 있다.
퇴계는 도산서당 동쪽에 작은 지당을 만들고 연꽃을 심어 정우당(淨友堂)이라 하고 이 못 동쪽으로 흐르는 작은 시냇가에 샘을 파고 몽천(夢川)이라 하였다. 또
한 시냇가에 단을 만들고 매, 죽, 송, 국을 심어 절우사(節友祠)라 하였다. 지금 이 서원의 정원에는 매, 죽, 송, 국, 작약, 벽도, 단풍, 은행, 느티, 산수유, 난, 철쭉 등이 있다.
경북 영주시 소수면에 위치한 고려 때의 학자 안향을 배향한 소수서원은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고, 옥산서원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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